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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1920년 9월28일. 유관순 열사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모진 고문 끝에 순국했다. 일제에 맞서 한반도 전역에 퍼진 3.1운동의 중심에서 태극기를 흔들던 꽃다운 17세 소녀였다.
1902년 12월16일 충남 목천군(현 천안) 한 가정집에서 우렁찬 목소리를 가진 여아가 태어났다. 3남1녀 중 둘째로 태어난 유 열사는 1916년 충남 공주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인 선교사 사애리시 부인의 추천으로 이화학당에 입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이화학당 고등과 1년생이던 유 열사는 시위에 동참했다. 같은해 3월5일 서울 만세 시위에도 참여했다.
조선총독부에서 임시휴교령을 내려 이화학당이 폐교하자 고향으로 돌아온 유 열사는 돌아온 뒤에도 항쟁의 뜻을 이어갔다. 지역 내 교회와 청신 학교를 돌아다니며 서울 독립운동 상황을 알렸다. 이러한 노력으로 4월1일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시위대 선두엔 유 열사가 있었다. 일제 헌병은 맨 앞 무리를 주동자로 간주해 체포했다. 하지만 미성년자임을 감안해 "범행을 인정하고 수사에 협조할 시 선처하겠다"고 제안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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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5월9일 공주지방법원 1심 재판에서 유 열사는 소요죄 및 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재판 당시 일본인 재판장은 "다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고 대일본제국 신민으로 살아갈 것을 맹세할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유 열사는 "나는 왜X 따위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언젠가 네X들은 반드시 처벌받고 반드시 망하게 되리라"며 의자를 집어 던졌다.
같은해 6월30일 유 열사는 항소해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년을 확정지었다. 상고는 하지 않았다. 다음해인 1920년 4월28일 일본 이왕세자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여왕의 결혼 기념 특사로 형이 1년6개월로 줄었다.
유 열사는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뒤로도 연신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제의 잔혹한 고문이 이어졌지만 수감자를 설득해 독립을 향한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결국 같은해 9월28일 오전 8시20분 유 열사는 방광이 파열해 옥사했다. 출소 이틀 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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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대문형무소에서 벌어진 고문의 참상은 끔찍했다. 여성의 질 안에 미꾸라지를 넣는가 하면 조그마한 상자 안에 가둬놓고 압정을 박기도 했다. 또 각종 전기·물 고문과 더불어 일제가 원하는 자백을 듣기 전까지 치아·손·발톱을 뽑았다.
유 열사 시신도 고문으로 인한 훼손이 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화학당 측이 시신반환을 요구했지만 서대문형무소에선 이를 거부했다. 이후 시간이 흘러 같은해 10월14일 룰루 프라이 이화학당 교장은 유 열사 시신을 인도받아 장례를 치렀다.
유 열사의 유해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지만 일제의 파묘 이후 유실됐다. 훗날 1989년 10월 유관순열사기념사업회는 강원 영월군 매봉산 기슭에 초혼묘를 만들어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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