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27일 그는 오는 6월3일 치러질 제21대 대통령선거의 본선 주자로 확정돼 다시 한 번 대선 본선 무대에 선다. 사진은 27일 오후 이재명 대선후보가 합동연설회에서 연설에 나선 모습. /사진=김성아 기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다시 한 번 대선 본선 무대에 선다. 27일 그는 오는 6월3일 치러질 제21대 대통령선거 본선 주자로 확정됐다. 2022년 3월9일 치러진 제20대 대선에서 윤석열 전 대통령에게 밀려 고배를 마신 지 3년3개월여만의 재도전이다.

기름때 묻은 손으로 쌓은 꿈… 이재명의 '억강부약'은 여기서 시작됐다

1963년 10월23일, 경북 안동 예안 도촌리의 깊은 산골.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이재명의 어린 시절은 지나칠 정도로 가족에게 냉담했던 아버지와 삶의 무게에 짓눌려 아들의 출생일조차 헷갈려했던 어머니 밑에서 빈곤하게 자랐다.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아버지는 어느 날 홀연히 고향을 떠났고 어머니는 깊은 산 속 밭을 일구며 아이들을 먹여 살렸다. 어린 이재명과 동생들도 지게에 땔감을 지고 40리 길을 걸어 밀가루 구호식품을 받아오는 등 고된 노동에 동참했다.

1976년 2월,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열세살 이재명은 중앙선 상행 완행열차에 몸을 싣고 아버지와 둘째형이 있는 성남으로 향했다. 청량리역에 내려 239번 버스를 타고 눈발 날리는 진창길을 지나 상대원동 언덕배기에 자리한 반지하 단칸방에 도착했다. 그는 새 터전의 첫인상이 고향 산골보다 더 열악했다고 회상한다.


소년공으로 보낸 6년, 기름때 묻은 손으로 쌓아 올린 이 시간들은 훗날 그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억강부약'(특권과 반칙에 기반한 강자의 욕망을 절제시키고 약자의 삶을 보듬는) 정치 철학의 토양이 됐다. 사진은 야구글로브 공장 '대양실업'에서 일하던 이 후보의 소년공 시절의 모습./사진=이재명 캠프 제공

이재명의 가족은 상대원 시장을 생활터전으로 삼았다. 아버지는 시장 청소부 일을 하며 생계를 꾸렸고 어머니와 사춘기 여동생은 시장 화장실을 청소했다. 형제들과 이재명은 모두 시장 옆 공단으로 흩어져 소년공 생활을 시작했다. 열세살에 소년공이 된 그는 목걸이 공장, 고무공장, 냉장고 공장 등을 전전했다. 브라보콘 가격이 130원이던 시절에 일당 500원가량을 받고 저녁 10시까지 야근, 새벽 2시까지 철야작업을 견뎌야 했다. 결국 모터벨트에 손이 끼이는 사고를 당해 손톱 밑에 고무가루가 박히고 프레스 사고로 왼팔 관절을 다쳐 6급 장애인 판정까지 받았다.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한 그에게 살 길은 공부뿐이었다. 1978년 4월 고입검정고시 야간반에 등록했다. 아버지는 공부 때문에 생계 전선에서 이탈하려는 이재명에게 "착실히 일이나 할 것이지 뭔놈의 공부냐"고 호통쳤지만 끝내 고입 검정고시 학원 야간반을 다니겠다는 아들의 고집을 꺾진 못했다.

1979년 여름, 오리엔트주식회사에 취직해 시계 표시판 도장·도금 작업을 맡았다. 밀폐된 작업실은 독한 화공약품 냄새로 숨쉬기조차 힘들었지만 남들 눈을 피해 책을 펼칠 수 있는 은신처이기도 했다. 할당량을 서둘러 마친 뒤 그는 작은 공간에서 대입 검정고시 교재를 읽었고 퇴근길엔 교과서 속 시(詩)를 외우며 고단한 심신을 달랬다.


공장 일을 하면서도 끊임없이 공부에 매진한 끝에 이재명은 같은 해 8월 고입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4월 대입 검정고시까지 통과했다. 소년공으로 보낸 6년, 기름때 묻은 손으로 쌓아 올린 이 시간들은 훗날 그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억강부약'(특권과 반칙에 기반한 강자의 욕망을 절제시키고 약자의 삶을 보듬는) 정치 철학의 토양이 됐다.

노동자의 아픔에서 길을 찾다…'약자를 위한 변호사' 결심


이재명은 일당을 받지 못한 일용직 노동자와 부당한 대우를 견뎌야 했던 여공,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부녀자들의 사연을 듣는 순간이면 자신의 소년공 시절이 떠올라 결코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았다. 사진은 이재명이 1986년 2월 중앙대 졸업식에서 아버지(가운데), 어머니(오른쪽)와 사진을 찍는 모습. /사진=이재명 블로그 캡처

1982년, 이재명은 중앙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 3년 등록금 전액 면제와 월 20만원 생활비 지원이라는 혜택을 얻은 덕분이었다. 대학 입학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장애 탓에 '정상적인' 회사에 취직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다시는 공장 노동자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다짐, 그리고 막연한 신분 상승의 욕망. 이 모든 것이 그를 신림동 고시원과 산속 절간으로 몰아넣었다. 끝내 그는 대학교 4학년이던 1986년 사법시험 최종 합격의 문턱을 넘어섰다.

민주화의 잔향이 한국 사회를 휘감던 1988년 어느 주말, 성남YMCA 회관 앞에서 당시 빈민운동가였던 이상락(훗날 열린우리당 의원)과 사법연수생 이재명이 만나게 됐다. 그날 이후 이재명은 YMCA 시민중계실에서 무료 법률 상담 봉사를 시작했다. 이재명은 일당을 받지 못한 일용직 노동자와 부당한 대우를 견뎌야 했던 여공,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부녀자들과 마주 앉았다. 노동자들의 사연을 듣는 순간이면 자신의 소년공 시절이 떠올라 결코 남의 일처럼 들리지 않았다.

학생 티를 벗지 못한 예비 법조인이었지만 그는 상담하러 온 이들에게 고단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의 가능성을 찾게 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약자를 위한 변호사'라는 진로를 굳혀 나갔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이재명이 노동법학회에 가입해 활동하던 중 당시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떨치던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강연을 듣게 되면서다. 그때부터 그의 꿈은 판·검사로서의 부와 안락이 아니라 억눌린 이들과 함께 싸우는 인권변호사로 확고히 굳어졌다.

'노상 변호사'로 현장을 지킨 청년, 정치 중심에 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는 1989년, 제2의 고향 성남에 변호사 사무소를 열어 가난한 이들과 강력범죄, 철거민이 많던 성남에서 그는 기득권 부패와 싸우고 고통받는 민중의 대변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사진은 성남 구시가지 대형 병원 폐쇄로 의료 공백이 심각해지자 이재명 후보가 릴레이 단식 농성에 나선 모습. /사진=이재명 블로그 캡처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 후보는 1989년, 제2의 고향 성남에 변호사 사무소를 열었다. 가난한 이들과 강력범죄, 철거민이 많던 성남에서 그는 기득권 부패와 싸우고 고통받는 민중의 대변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같은 해 말 미상공회의소 점거 사건을 계기로 노동운동가들과 인연을 맺었고 법원 앞에 단독 사무실을 열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구속 노동자 무료 변론, 광주 노동상담소 개설 등 '노상 변호사'로 현장을 지킨 그는 2006년 자신의 블로그에 "그들에게 가장 쓸모 있는 도구가 되는 것이야말로 가난에 쫓겨와 소년 노동자로 뼈아픈 시절을 보낸 내가 가장 자랑스러웠던 시간"이라고 회고했다.

이 시기 그는 피아노 전공자였던 김혜경 여사를 셋째 형수의 소개로 만나 약 1년의 열애 끝에 결혼해 두 아들을 두게 됐다.

이 후보는 성남 구시가지 대형 병원 폐쇄로 의료 공백이 심각해지자 그는 직접 시장이 돼 시립의료원을 만들겠다 결심했다. 사진은 이제명 후보와 김혜경 여사(좌), 그들의 아들의 모습. /사진=이재명 블로그 캡처

"남들이 다 가는 학교 대신 도시락 싸들고 공장 다니던 길가와 공장 담벼락엔 유난히 개나리가 많았지만 어느 순간 그 개나리들은 갑자기 내 인식에서 사라져 버렸다. (중략) 내 인생에서 비주류성과 소외의 그림자가 사라지는 것과 비례해서 개나리에 대한 기억도 그만큼 사라져 갔다. 그러던 개나리가 갑자기 다시 나타났다. 2004년 3월 말이었다." (2006년 이재명 블로그 中)

2004년, 성남 구시가지 대형 병원 폐쇄로 의료 공백이 심각해지자 그는 직접 시장이 돼 시립의료원을 만들겠다 결심했다. "사람들의 삶에 대한 고려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그들을 내몰아야 한다는 의무감과 사람들의 고통스런 삶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된다는 사명감이 밀려 와" 시장출마를 결심했다. 그렇게 '정치인 이재명'이 탄생했다.

이 후보는 2006년 지방선거에 도전했지만 낙선했고 2008년 총선 경선에서도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2010년 민주당 소속으로 성남시장에 재도전해 마침내 당선됐다. 취임 11일 만에 성남시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을 선언하는 파격적 행보로 주목받았고 공무원 인사비리 척결과 재정 정상화로 2014년 재선에 성공했다. 성남시장 시절 무상 교복, 공공산후조리 지원, 청년 배당 등 보편적 복지 정책을 통해 '이재명표 브랜드'를 확립했다.

'변방의 장수'였던 그는 2016년 최순실 게이트가 터지자 가장 먼저 '박근혜 대통령 탄핵'을 외치며 야권 지지층의 주목을 받았다. 돌직구 발언과 사이다 행보로 견고한 팬덤을 구축하며 대선주자 반열에 올랐다.

2017년 대선 경선에서는 문재인 후보에게 패했지만 2018년 경기도지사에 당선되며 재도약했다. 도지사 시절 청년통장과 닥터헬기 구매, 공공배달앱 개발, 지역화폐, 수술실 CCTV 설치 등 생활 밀착형 정책을 추진했다. 동시에 기본소득·기본금융·기본주택 등 '기본 시리즈' 정책을 구체화하며 차세대 대권 주자로 부상했다.

2022년 제20대 대선에 재도전한 그는 0.73%p(포인트) 차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에게 패했지만 곧 인천 계양을 보궐선거에 출마해 당선됐고 같은 해 8월 민주당 대표에 선출됐다. 지난해 4월 실시된 제22대 총선에서는 민주당 압승을 이끌며 정치권의 중심에 섰다. 같은 해 열린 전당대회에서는 85%라는 역대급 득표율로 재신임을 얻어 '이재명 일극 체제'를 완성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차기 대선주자 선호도 1위를 달리고 있다.

'길 위의 사명'에서 '잘사니즘'까지…이재명의 꿈


참혹했던 어린 시절을 딛고 '불평등·불합리·불공정'을 개선하겠다는 목표를 품은 그는 2025년 4월 27일, 다시 한 번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사진은 대선 출마를 선언한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2일 고향인 경북 안동을 방문해 부모 선영을 참배하는 모습. /사진=이재명 블로그 캡처

"거칠지만 인정 넘치는 성남의 시장통, 공장의 차가운 불빛, 노동자들의 지친 어깨, 그리고 길거리." 이재명 후보는 바로 그것들이 자신을 키워, 그래서 힘이 넘친다고 했다. 그곳에서 함께한 이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사명감을 품게 됐다는 것.

정치에 뛰어든 이유 역시 다르지 않았다. "생존을 위해 습기차고 어두운 공장에서 하루를 꼬박 어린 몸을 구겨놓고 일을 했으며, 턱없이 모자라는, 제때에 주어지지 않는 월급을 받기 위해 길거리로 뛰쳐나온 노동자들과 어깨를 함께 했다. 분명 국민이 주인인 시대는 되었건만 여전히 그들 위에 군림하고 제 뱃속 채우기에 급급한 행정관료들과 싸우느라 길 위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재명 블로그 中)

참혹했던 어린 시절을 딛고 '불평등·불합리·불공정'을 개선하겠다는 목표를 품은 그는 2025년 4월 27일, 다시 한 번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됐다. 여전히 같은 이유로 길 위에 섰다. "대립과 갈등이 큰 이유는 경제력 때문이다. 더 잘살게 됐는데도 부족한 것은 부가 편중됐기 때문이다. 총량은 늘었지만 너무 많이 한 군데에 몰려 있다. 그게 갈등의 원인이다." (2025년 4월10일 이재명 발언)

지난 대선 당시 이재명은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겠다"는 이른바 '먹사니즘'을 다짐했다. 그의 다짐은 2025년 '잘사니즘'으로 돌아욌다. 민생 문제 해결을 통해 당장 국민의 삶을 개선하고 성장의 과실을 고루 나눠 풍요롭게 살 수 있도록 돕는 '최고의 도구'가 되겠다 밝혔다. 'K-이니셔티브'로 대한민국을 인공지능(AI) 3대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청사진도 내놓았다. AI 투자 100조원 시대를 열어 성장을 견인하고, 그 과실을 공평하게 나누겠다는 그의 구상이 오는 6월3일 이후 현실로 이어질 수 있을지 주목된다.